집을 떠나며

연극'집을 떠나며-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른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고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 흥 모님의 글

2018.12

< 현대의 한 가정, 아들은 반복되는 열악한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아들은 홀로 남아 집을 지키며 노래한다. 깜깜한 빛도 죽은 밤,,,  제삿날 아들은 출판사로부터 소포 - 소설 ‘집을 떠나며’ -를 받는다. 하나둘씩 모이는 죽었거나 사라진 아들의 가족들, 가족들은 아들의 기억의 시간과 함께 등장한다. 무대 한편에 놓인 야전턴테이블에서는 스모키 노래 living next door to alice가 흘러나온다. 흰색 군복을 입은 남자가 등장해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닌 예술이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 말한다. 전쟁이 없어야 평화겠지만 누구나 마음껏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평화라는 것이다. 그는 누구일까? 그는 남자로 설정됐는데 해설자로 엄마의 정부로 딸의 애인으로 이들 가족을 파괴하는 인물이고 국가와 사회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존재다.

IMF로 실직한 후 사라졌다가 7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개인이 손쓸 수 없는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 속에서 외계인에게 침공 받은 지구인처럼 속절없이 절망 속에서 허덕이다 끝내 골방만이 자신에게 허락한 세계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기에 어떤 이유를 찾아서라도 집을 떠나고 싶어 하는 엄마...정부와 바람이 나서 집을 떠나 사라져버린다.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기에 엄마의 남자에게서라도 사랑을 느끼고자 하는 연약한 여동생... 손목을 그어 자살한 여동생 그리고 여동생과 사랑했던 해군남자. 관객들은 가족들이 서로에게 가해자이자 피해자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온 가족이 집을 떠난다. 그러나 가족들의 불행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전쟁과 경제적 몰락이라는 국가적, 사회적 잘못에 기인함을 인식하게 된다. 아들에게 과거 자신이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려던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다른 남자의 정부가 된 아내와 자살한 딸의 소식을 듣게 된다. 망연자실한 아버지는 과거에 만났던 베트남 여자와 아내를 혼돈하게 되고, 아버지는 영영 전쟁의 기억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골방에서 죽어간다. 한 가족의 광폭한 기억의 시간과 공간이, 아들의 입장에서 관객들에게 전달되어진다. 결국. 가족사의 환영 속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아들은 소포로 배달된 한권의 책 ‘집을 떠나며’를 읽고, 베트남에서 태어나 예술가로 성공한 이복누이 지앙 빈을 만나기 위해 집을 떠나게 된다.> 

 2015년 일본 동경 타이니 아리스 페스티벌 초청작, 2016년 광주국제평화연극제 초청작. 2016년 대한민국 소극장 열전 초청작이자 연극집단 반 20주년 기념작인 <집을 떠나며>는 가족이라는 구성원들이 전쟁과 자본의 의해 파괴되어지는 현상과 아픔을 보여주고 있는데 연극집단 반의 연극행위는 어두움과 이면을 먼저 들추어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기에 박장렬 연출은 자신의 연극을 “블랙리얼리즘”이라고 부르고 있고 블랙리얼리즘 1탄으로 ‘신발-뜨겁고 격렬한 인생’, 2탄으로 ‘이혈’, 3탄으로 ‘집을 떠나며’를 무대에 올렸다. 

영화 매트릭스(1999년) 1편이 인간이 기계가 구축해놓은 시스템인 '매트릭스'의 노예라는 사실을 '각성'하고 그 허상을 깨뜨리고 나올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런 현실보다 차라리 안락한 허상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면, 2003년에 개봉된 '2편: 리로디드' 는 더욱 확장된 세계관을 통하여 네오가 스스로의 '선택의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시리즈의 종결인 '3편: 레볼루션'은 그러한 선택들이 어떠한 대단원의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마무리를 그린다. 영화를 좋아하는 몇몇 정신분석학자들은 영화 Matrix 1부는 Id의 관점으로, 2부는 Ego의 관점으로, 3부는 Superego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로 분석하기도 한다. 프로이드는 마음을 무의식, 전의식 및 의식으로 나누어서 관찰했는데 초기 성격구조 이론의 중심 개념은 무의식(無意識)이다. 이 무의식과 정신적 에너지를 결합하여 자아Ego, 이드Id, 초자아Superego의 삼원적 구조모형(tripartite structural model)을 제시하였다. 이드가 "길들여지지 않은 열정"이라면 자아는 "이성과 분별"을 뜻하며 자아는 이드의 쾌락적 원리와는 달리 현실의 원리를 따른다. 초자아는 인간마음속에 있는 윤리적, 도덕적, 이상적인 면을 말하며 성격구조 중 마지막으로 발달되는 체계로써 부모의 양육태도 즉, 부모가 주는 보상과 처벌에 대한 반응으로 발달한다. 박장렬 연출의 “블랙리얼리즘”작품들도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보면 1탄인 ‘신발-뜨겁고 격렬한 인생’는  이드Id의 관점의 작품으로  2탄인 ‘이혈, 21세기 살인자’는 자아Ego의 관점 , 3탄 ‘집을 떠나며’는 초자아Superego의 관점에서의 작품으로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블랙리얼리즘 1탄인 연극 ‘신발-뜨겁고 격렬한 인생’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드Id의 관점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 일반적인 대화체 연극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욕동(Id)에 충실한 구조주의적 (라깡적)언어를 통해 연극의 또 다른 형태로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작품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글을 직접 쓰고 연출한 박장렬과 연극집단 反은 장면의 파편들, 인물들의 기억들의 파편들을 모아 독특한 실험의 장을 열었다. 

“유민규는 신발끈 공장을 하고 있다. 사업이 각박하고 힘들었던 시절 노래방에서 만난 필리핀 노동자 제시카! 제시카를 만나 승승장구하던 유민규. 그의 성공 후에 버림받은 제시카는 유민규의 공장에 불을 지르고 그의 모든 걸 빼앗고 불 속에서 자살을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 노숙자가 된 유민규는 파도가 치는 바다 방파제에서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는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Ego(자아)의 목적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적절한 과정을 발달시키는데 있다. 자아는 성격의 조정자이며 집행자이지만 자아는 자신의 에너지가 없으므로 이드에게서 그 에너지를 빌려와야 한다. 자아는 이드의 목적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고 적절히 추진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자아와 이드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고 본능적인 요소와 주위 환경의 상태를 적절히 조정하여 개인의 생활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자살기도로 섬망(delirium)상태가 되어버리면 이런 자아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지남력 등이 사라져버리고 통제할 수 없는 그저 욕동의 에너지덩어리인 이드Id만 남게 된다. 이드는 무의식의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그 언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의 세계의 일상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표현되게 되는데 연극집단 反이 장면의 파편들, 인물들의 기억들의 파편들을 모아 독특한 언어의 연극을 보여 주었듯이 정렬되지 않는 무의식의 언어로 표현되어진다. 그렇기 때문에‘신발’은 마치 우리 모두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것처럼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서 존재한다.

“극의 배경은 바닷물이 갈라지면 육지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는 섬이다. 이곳 사람들은 파도에 밀려 흘러 들어오는 신발을 주워 모은다. 어느 날 이곳에 한 남자가 당도한다. 방파제 위에 선 그는 삶을 포기하기 위해 바다로 몸을 던진다. 그 순간 기억이 뒤엉킨다...”

단순한 스펠링의 연속으로 이어진 듯한 computer 언어와 같이 마치 DNA내에 숨어있는 code언어로 표현되어지는데 순서흐름도 없고 의미도 없는 듯 하지만 전체적을 잘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위대한 비밀의 상징의 언어들이 나름대로의 정렬을 하면서 함축되어 있다.

"공장의 연기인지, 알 수 없는 연기가 깔려있는 가공의 섬은 관념·추억·불안을 상징하는 공간이고 우리의 기억이 온전치 않은 것처럼 무대에는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존재한다... 공연시작부터 끝까지 머리 속에 맴도는 ‘기억’들의 각 장면은 단편적이고, 시간도 장소도 애매하게 흘러간다. 때로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한꺼번에, 혹은 연속적으로 무대에 표현된다. 또한 우리들의 기억 또한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도, 상대방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다른 것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주인공 민규 엄마는 민규의 기억 속에서 애인 제시카의 엄마가 되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도 한다. 제시카가 공장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을 때, 몇 개의 발이 등장해 춤을 추고, 또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사람들이 신발을 상자에 넣고 있는 부분에서도 맨발이다. 우리들이 투신자살 전에 반드시 신발을 벗는 것도, 맨발이 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은 원래 맨발로 대지를 밟고 사라가고 싶지만,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신지 않으면 안된다. 무대에 쌓아 올려진 신발상자, 매년 그 수는 늘어나고 있다는 신발 상자 더미를 부수고 자살을 결심한 민규는 과거를 둘러보고, 신발끈을 고쳐 매고 사회로 돌아간 그가 뛰쳐나오면서, “이길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죽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려고 한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사회에 돌아오지만, 역시 이길 수 없었다. 아니면 지고 만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블랙리얼리즘” 1탄인 연극 ‘신발-뜨겁고 격렬한 인생’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드Id의 관점의 작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언어로서 연극을 할 때 관객들에게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지고 힘들겠지만 구조주의적 연극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탄인 ‘이혈, 21세기 살인자’는 영화 <해무>의 원작자 김민정 작가와 <연극집단 반> 박장렬 연출의 작품으로 만화가의 죽음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준다.

인기 웹툰작가 강준의 자살...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이 이혈 웹툰속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들며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강준의 할머니 강예분이 겪어야만 했던 위안부 시절과,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던 물리적인 임신과 출산... 강준의 아버지 강한구와 어머니 에이코의 복수로 이어지는 비극...가해자는 피해자를 만들고, 그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어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며... 다른 피 이혈(異血) ...21세기에도 계속되어지고있는 우리의 아픈역사와 개인의 뼈아픈 역사....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살인 사건들이 해결되는 과정에서 역사 속 피해자들의 흔적이 드러난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 속에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피가 섞여 있는 사람들이 일상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연극 <이혈>에서는 박장렬 연출이 직접 쓴 작품은 아니어서 욕동(Id)에 충실한 구조주의적 언어는 많이 줄었지만 연출로서 장면의 파편들, 인물들의 기억들의 파편들을 모아 표현하는 독특한 실험은 계속하고 있다. 만화 작가 강준의 자살과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 ‘이혈’... 만화 ‘이혈’ 속에서 만나는 판타지는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운 강준의 내면이 이 작품의 이드Id적인 요소로 그려지며 그 에너지를 받아서 한일 간의 가해와 피해의 역사 속에서 일그러진 괴물로 표현된 만화 속 주인공 강준과 강준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풀어야 하는 두 형사와 여성 프로파일러가 자아Ego로서 참여하여 참혹한 과거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본질적 고통과 시대적 부조리를 무대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자아Ego의 관점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3탄 ‘집을 떠나며’는 초자아Superego의 관점에서의 작품으로 분석해 볼 수 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변되는 초자아의 부재로 인한 자아의 혼란됨이 그려지고 있다. 혼란된 자아Ego로서의 아들은 홀로 남아 집을 지키며 노래하고 깜깜한 빛도 죽은 밤... 제삿날에 아들은 출판사로부터  소설 ‘집을 떠나며’를 받으면서 파편된 조각의 기억은 재구성되어진다. 하나둘씩 모이는 죽었거나 사라진 아들의 가족들, 가족들은 아들의 기억의 시간과 함께 등장하는데 가족이라는 구성원들이 전쟁과 자본의 의해 파괴되어지는 현상과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초자아는 자아에 비해 이드의 열망에 대하여 더 민감한 경향이 있고 따라서 자아보다 더욱더 무의식속에 묻혀 있다. 프로이드는 초자아를 두 개의 하위체계 즉, 도덕적 양심(conscience)과 자아이상(ego ideal)으로 나누었는데 초자아는 외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해결되는 기간에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형성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도덕적 상징자로서 중요한 역할자가 된다. 또 다른 초자아로 대변되는 흰색 군복을 입은 남자가 등장해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닌 예술이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 말한다. 전쟁이 없어야 평화겠지만 누구나 마음껏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평화라는 형이상학적인 주장을 마치 자아이상(ego ideal)을 이야기하는 듯 한 그는 누구일까? 그는 남자로 설정됐는데 해설자로 엄마의 정부로 딸의 애인으로 이들 가족을 파괴하는 인물로 도덕적 양심(conscience)을 상실한 왜곡된 초자아로 국가와 사회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존재다. 

초연때 ‘연극 집을 떠나며 는 기억의 파편들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작가인 아들의 눈에 투영되는 가족과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그렸지만 너무 단편적이어 온전한 기억으로 이어지지 않아 퍼즐 조각을 맞추기 힘들고 아직도 다 못 맞췄다‘는 평을 받았는데 1탄 ‘신발-뜨겁고 격렬한 인생’의 영향 속에서 쓴 작품이어서 일반적인 대화체 연극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욕동(Id)에 충실한 구조주의적 (라깡적)언어를 통해 작품을 표현했기 때문에 좀 더 비구조적인 작품으로 평가절하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번 공연인 연극 <집을 떠나며_나는 아직 사랑을 모른다>는 ‘좀 더 친절한 연극이면 좋았겠다’는 평을 의식해서인가 지극히 친절한 작품으로 변화하였고 ‘이혈, 21세기 살인자’를 계속 연출하면서 영향을 받아서 인지 Ego의 기능을 강화시켜서 관객이 좀 더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집 나간 고양이를 찾는 그녀를 등장시키고 그녀에게 '집을 떠나며'를 읽어주기도 하고 작가가 베트남에 있는 자신의 이복누이일지도 모르며 언젠가는 만나러 갈 것이라는 것도 이야기하는 등 좀 더 설명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 관객친화(?)적인 작품으로 변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필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초연(初演)때 작품이 거칠기는 하지만 상징성을 더 리얼하게 표현하여 작품성(作品性)은 더 있었다고 생각한다.

“집을 떠나며_나는 아직 사랑을 모른다”를 좀 더 분석해보면 다양하고 흥미로운 요소를 꽤 많이 발견할 수 있다. 

< 스모키 노래가 흐르는 무대. 엄마는 미싱을 돌리고 아들은 책을 읽고 아버지는 헤드셋을 끼고 파리채를 휘두르고 딸은 소파에 웅크린 채 있다. 빗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우산을 쓰고 나간다. 아버지가 쫓아가며 제발 가지 말라고 외친다... 엄마는 집 나간 아버지를 대신해 남자들과 몸을 섞어 받은 돈으로 자식들을 부양해왔다. 어린 남자와 잤는데 그 아버지가 미성년자 운운하며 협박해 다리를 벌려줬고 다시 그 두 사람과 쓰리썸까지 했다는 얘기를 아들에게 거침없이 말하며 가슴팍에서 돈뭉치를 꺼낸다. 모든 엄마가 자식을 부양하려고 창녀가 되진 않는다며 소리치는 아들... 엄마는 딸이 잘못된 것도 자신 탓이 아니라며 혼란스러워한다. 청바지를 사왔으니 입어보라고 내미는데 아동복이다...>

이 전개는 이 작품의 구조주의적 언어의 상징성이 잘 표현된 부분으로 생각된다. 미싱(재봉틀)으로 상징된 1970년대 이전의 2차산업구조가 1080년대 이후의 3차산업인 서비스산업으로의 변화되어 가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변화현상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 주었고 베트남 참전용사로 전쟁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골방에 틀어박혀있는 아버지는 국가에 의해 군인과 건설노동자로 팔려 나가던 시대의 아픔으로... 가족내에서 희생하면서 수동적으로 살던 그 시대의 여성어머니들이 더 이상 가정내에만 머물지 않고 우산을 쓰고 나가서 고객을 상대하면서 웃음을 팔아 돈을 벌어서 가정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 돈이 지배하기 시작하는 시대속의 ‘창녀’라는 상징으로 잘 표현해 주었다. 청바지를 사왔으니 입어보라고 내미는데 아동복이라는 상징은 모친에 의해 거세되어 성장을 멈춰버린 소년들의 모습을...내내 배고픈 아들을 위해 음식을 사왔다는 엄마의 가방에서 나오는 책(冊)은 우리들 부모의 교육을 빙자한 학대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 주었고 아들이 나무 권총으로 엄마를 향해 발사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던 엄마가 다시 살아나고 다시 총을 쏘고 뒹굴다가 다시 살아나는 슬로비디어같은 반복되는 영화와 같은 장면은 우리가 인생속에서 얼마나 많이 부모를 속이고 배신하면서 수많은 심리적 모친살해를 저지르고 있다는 상징의 표현으로 이번 연극의 백미(白眉)의 장면이었다. 베트남 참전용사인 아버지가 그때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골방에 틀어박혀있고 다리를 저는 모습을 아들은 자신이 그렇게 했다고 믿지만 어릴 적 아버지에게 야구방망이로 숱하게 맞으면서 외톨이로 성장한 자신의 과거의 트라우마를 트란스포머하여 왜곡된 기억으로 서술한 부분도 이 작품을 윤택하게 해주고 있다.  

< 달빛이 고요한 밤. 이들 가족이 탈출을 감행한다. 아버지가 이념에 반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아들은 왜 그런 글을 써서 가족을 곤경에 빠지게 하냐며 툴툴거린다. 어둠 속에서 불빛이 세 번 반짝이면 오케이 신호이고 그때 건너면 된다. 아들이 수영을 못한다며 걱정하자 강물이 기껏해야 가슴팍 정도일 테니 괜찮을 것이라 다독인다. 불빛이 세 번을 넘어 깜박거리다 몇 번을 더 깜빡거리고 세 번에서 멈춘다. 아들은 뭔가 이상하다며 건너지 말자고 하지만 남을지 갈지 결정하라 채근한다. 결국 홀로 남은 아들은 잘 한 결정이라며 자신을 다독이는데 어둠 속에서 총성이 들린다. 그러더니 남자와 엄마가 가방을 들고 황급히 사라진다. 쫓아가보지만 찾을 수 없다. >

탈주민 장면같이 묘사된 이 장면은 나(self)를 둘러싸고 있는 오브제인 세상과 시대에 대한 불신과 결국 모든 결정은 스스로 밖에 할 수 밖에 없고 세상에서 거세되어 결국 혼자 남게 된다는 작가의 사상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다.

개인이 손쓸 수 없는 역사적, 사회적 사건들 속에서 속절없이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외계인에게 침공 받아 흉측한 성기로 유린당하는 지구인처럼 그린 것은 ‘집을 떠나며’에서 묘사된 상징적 표현들 중에 최고의 압권(壓卷)으로 생각되어진다. 영화‘국가부도의 날’에서 그렸듯이 우리나라가 97년말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이걸 갚는 그런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을 특히 당시에 경제 주권을 빼앗긴 것을 우리는 IMF라고 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사람들에게 IMF는 세계 무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유동성 위기에 빠진 국가에 돈을 빌려주는 국제 금융 기구인 국제 통화 기금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유린하는 외계인 IMF(I‘M Foreiner)였을거고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부대원 전원이 한 여자를 윤간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이들 군인들이 그 베트남여인한테는 외계인이었을 거고 거대한 나무에 묶힌 체 흉기로 유린당하는 거 같았을 거다. 이 묘사야 말로 박장렬 작가의 욕동(Id)에 충실한 구조주의적 (라깡적)언어의 최고의 백미(白眉)적인 표현일 것이다.

연극은 인간 한사람의 이드, 자아, 초자아와 그들을 싸고 있는 외계(external world)가 서로 달리 사물을 보는 그 관점들을 보여줄 수 있다. 영화와 달리 보여지는 상징성으로만 표현되어지지는 않고 그 안에 존재하는 Representation의 표현을 통하여 관객 스스로의 자아를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야 말로 프로이드를 통해서 보는 연극작품분석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연극 “집을 떠나며”는 ‘신발’, ‘이혈’과 함께 우리나라 작품중에 오래간만에 이런 프로이드적인 분석으로 해석이 가능한 시대성을 내포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이번 연극에서 이드, 자아, 초자아들의 완숙된 연출과 연기를 통해 Psychic Energy의 앙상블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 필자의 너무나도 큰 욕심이 아니었기를 기대해본다.

좋은 연극을 보고나서 혜화동집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 흥 모

정신분석용어사전

표상[ REPRESENTATION]

원래의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 이미지 또는 형상. 정신적 표상은 정신 안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재생산되는 의미 있는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일컫는다. 이 표상에는 역동적 세력의 증가와 감소에 따라 리비도가 더 많이 집중되기도 하고 더 적게 집중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자아의 하부 구조를 구성하며 자아 내용물의 일부로 간주된다.

인간은 출생 시 정신적 표상을 갖지 않은 채 태어나지만, 경험을 통해 차츰 내부와 외부, 자기와 비자기의 차이들에 대한 지각을 정신 안에 기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기와 비자기를 구별하는 지각의 기억 흔적들이 생겨나고, 성숙 과정과 함께 자기와 대상 표상들의 핵이 정교화되고 의식 안에 수용된다. 처음에 그것들은 불안정한 상태이며, 유아가 포만감을 느끼거나 잠이 드는 순간에는 이 자기와 대상간의 구별이 쉽게 사라진다. 아기가 배고파서 깨어나 울 때, 자기 및 대상 표상들은 다시금 구별 되고 분리된 것으로 경험된다. 따라서 자기와 대상 표상의 구별 이 욕구와의 관련 속에서 발생하는 이 시기에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상이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성숙 과정이 더욱 진행되면서, 정신적 표상은 보다 복잡해지고 고유한 것이 되며, 궁극적으로는 욕구 상태와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리비도가 집중되는 상태에 도달한다—대상 항상성의 단계. 심리생리학적 자기의 측면은 자기의 정신적 표상과 융합된다. 이와 유사하게, 생명이 있는 대상이든 무생물 대상이든 관계없이, 중요한 대상의 모든 측면들은 그 개인 자신의 표상적 세계, 즉 그의 내적 대상 세계의 일부로써 지각된다.

관념적 표상은 사고나 생각의 토대를 제공하는 정신적 표상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정신적 표상과 동일하다. 본능적 표상은 자기 표상 안에 존재하는 개인의 욕동(원본능) 측면들을 말한다. 원본능뿐만 아니라 자아 자체와 초자아 또한 표상화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재능, 능력, 약점, 억제, 제한, 불안, 도덕과 윤리기준 등에 대한 이미지를 갖는 것처럼, 욕동의 성질, 즉 욕동의 강도, 유연성, 전치 가능성 그리고 길들여지거나 승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미지도 갖는다.

정신 에너지[ PSYCHIC ENERGY ]

신체적 에너지와 대비되는 가상적인 양적 에너지로서, 정신 기구를 활동하게 함으로써 모든 정신적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이 개념은 프로이트에 의해 매우 초기부터 이론화되었지만,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고, 결국은 포기되기에 이르렀다 (Kubie, 1947; Holt, 1967; Rosenblatt andThickstun, 1970).

1923년에, 프로이트는 정신 에너지를 성적 에너지(또는 리비도)와 공격적 에너지로 구분했다. 그는 이 개념을 토대로 성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은 중립적 에너지는 성적 요소들과 공격적 요소들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이후 분석가들은 중립적 에너지가 정신 에너지의 융합, 탈성화(desexualization), 또는 탈공격화(deaggressivation)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초기부터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정신 에너지뿐 아니라 정신 구조 또한 분화되지 않은 발달 단계가 있다고 가정했다. 초기 이론에서 욕동은 정서와 마찬가지로 정신 에너지의 양으로 간주되었다.

1894년에, 프로이트는 정신 에너지를 “…마치 신체 표면 위에 전기가 퍼지는 것처럼 생각의 기억흔적 위에 퍼지는 어떤 것”이라고 묘사했다(p. 60). 그는 생각 또는 정신적 표상에 정신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을 집중(cathexis)이라고 불렀다. 이때 우리는 생각이나 표상에 리비도가 집중되었다고 말한다. 생각에 리비도가 집중된 정도는 두 개의 사고 유형, 즉 일차 과정과 이차 과정을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일차 과정에서, 에너지는 비교적 쉽게 움직이고(mobile), 중립화되지 않는 반면, 이차 과정에서 에너지는 사고가 무엇인가에 묶이고(bound) 중립화되며, 즉각적인 해소를 자제한다. 그리고 반집중(anti-cathexis)은 억압을 야기하는 요소를 지칭하는 반면, 과잉 집중(hypercathexis)은 주의 집중 현상을 설명하는데 사용된다.

정신 에너지는 동기를 불러일으키거나 실제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갖는다. 정신 에너지가 축적되면, 그것을 방출하려고 하는 직접적인 힘이 작용한다. 이러한 방출 모델은 본능적 욕동에 근거한 동기 이론으로서 정신분석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처럼 정신 에너지는 수단으로서 사용되지만, 다른 한편 그 에너지의 일부는 목적(예컨대 신호 불안을 만들어 내거나 무의식적 사고를 의식으로 가져오는 것)을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정신 기구 안에서 정신 에너지의 수준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 개의 조절 원리(regulatory principle)가 사용된다. 프로이트의 이론 형성 초기에 자리를 잡은 관성의 원리(inertia principle)는 정신 기구의 일차적 기능이 자극 또는 에너지로부터 벗어나서 비활성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이후에 열반 원리(Nirvana principle)로 대치되었는데, 이 원리에는 죽음 본능이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열반 원리라는 용어는 에너지 수준을 0이나 최대한 0에 가깝게 유지하려는 정신 기구의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서 “쾌락 원리를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1920)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인간 욕망의 사멸을 통해 도달하는 최고의 행복한 상태를 의미하는 불교의 개념에서 온 것이다. 열반 원리는 가능한 한 낮은 수준으로 일정하게 흥분을 유지하고자 하는 항상성 원리(constancy principle)과 거의 동일 하다. 프로이트는 유기체가 특정 행동을 위해 충분한 에너지를 저장애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원리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항상성 원리는 이후에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피한다는 쾌락 원리와 결합되었다. 정신 에너지의 축적은 불쾌를 야기하는 반면, 그것의 방출은 쾌락을 가져온다. 따라서 정신 에너지는 쾌락 원리의 지배 아래 즉각적인 방출을 추구한다. 프로이트는 임상적 관찰들을 통해, 방출은 쾌락, 축적은 불쾌(예를 들어, 성행위는 쾌락적인 에너지가 축적되는 과정을 포함한다)라는 공식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축적과 방출의 리듬이라는 또 다른 요소를 포함시키기 위해 이 이론을 약간 수정하고자 했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신 에너지의 개념은 심리 경제적 관점의 핵심적인 내용일 뿐만 아니라 역동적 관점을 위해서도 중요한 내용이다. 따라서 정신 과정이나 행동에 대한 모든 초심리학적인 설명은 에너지 집중과 반집중(countercathexes)에 대한 검토를 포함한다. 또한 이때 사용된 에너지가 리비도적인지, 공격적인지, 중립적인지 그리고 이 에너지가 어떻게 배치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